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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달사와 장독골샘 (영암읍 서남리)

읍내 서남리 삼거리에 '장독골샘'이란 우물이 있다. 이 삼거리 북편에 30평 가량의 공지가 있고 이곳에 사방 2.5m, 길이 4m 가량의 샘 두 개가 있다. 이 중 하나는 근래에 판 샘이고「倡梁達泗碑」곁에 있는 샘이 바로 장독샘 또는 장군정(將軍井)이라 부르는 우물이다.

장독이라 함은 군인들 기(旗)중 장군 표지기를 이르는 것이다. 이곳에 을묘왜변 때 양달사 장군이 그의 기를 꽂아 물을 솟게 했다고 해서 장독샘 또는 장군정(將軍井)이라 하는 것이다. 양달사는 제주 주부(濟州主簿)를 지낸 양승조와 청주 한씨 사이에서 1519년 도포면 봉호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해남 현감을 지냈다가 1555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버리고 시묘를 위해 고향에 돌아왔다.

이 무렵 왜구들은 1552년과 53년의 두해에 걸쳐 제주를 노략질하고 1555년 5월 60여척의 병선을 이끌고 달양진에 들어와 그 위세가 대단했다. 이 때문에 당시 영암군수 이덕견은 싸움다운 싸움도 해보지 않고 항복해버려 며칠 사이에 영암군 관아가 그들의 발길에 짓밟히게 됐다. 영암읍에서 9km거리에 있는 봉호정(鳳湖亭)에 귀향해 있던 양달사는 이 비보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상중(喪中)의 몸이라 어찌할바를 몰랐던 그는 그 사촌동생으로 부제학의 자리에 있던 양서정에게 사람을 보내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느냐고 상의했다. 양서정 부제학은 "충효일체(忠孝一體)라 하거늘 어찌 이 난리를 보고만 있으려 합니까"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즉시 형 달수, 동생 달해 및 달초와 더불어 의병을 모집해 영암읍으로 향했다. 이미 왜구가 읍내 주변으로 들어와 있으므로 이들과 3일간이나 격전을 벌였다.

당시 관군(官軍)은 완산부윤(完山府尹)으로 있던 이윤경(李潤慶, 1498∼1562년)이 인솔했다. 전쟁터에는 물이 없었다. 연 3일간의 격전 끝에 적에게 포위되어 군량미가 떨어지고 음료수가 고갈되어 큰 혼란과 굶주림과 갈증을 겪게 되었다. 군사들의 동태를 살피던 양 장군은 군령기를 높이 들고 한번 호령한 뒤 땅을 내리찧자 신기하게도 「쾅」소리와 함께 군령기를 찍었던 자리에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너무나 뜻밖의 광경을 바라보던 군사들은 함성을 올리며 솟아오르는 물로 갈증을 달래고 사기가 충천하여 수많은 외적을 섬멸하였다. 이와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어서 이 샘을 장독골샘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왜변은 양 장군의 창의군 활약에 힘입어 진압했으나, 자신은 상중의 몸으로 출전한 것이라 관군을 이끌었던 이윤경에 그 공을 모두 돌렸다. 결국 이윤경은 그 공으로 전라감사가 됐고 뒤에 병조판서까지 됐다. 양 장군은 이 전쟁 때 등에 창을 찔렸는데 고향에 돌아가 3년 시묘를 마친 뒤 결국 부상당한 여독을 뿌리뽑지 못해 41세 되던 1559년 죽었다. 뒤에야 이 사실이 알려져 죽은 뒤 100년 만인 현종 때 좌승지로 추증됐고 충신으로 정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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